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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코끼리와 벼룩

“나는 얼핏 내 과거를 돌아보았다. 영국 공립학교와 옥스퍼드 대학이라는 가장 좋은(혹은 가장 나쁜) 교육기관에서의 수업, 군대와 공무원을 혼합해 놓은 것 같은 다국적 기업 셀에서의 직장생활, 심지어 설립부터 내가 관여한 런던 경영대학원도 내 앞의 세계를 헤쳐나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세계적인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가 자신의 저서 ‘코끼리와 벼룩’에서 고백한 말이다. 찰스 핸디는 거대조직(코끼리)의 일원인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 개인(벼룩) 스스로가 조직인 사회가 온다고 예견한다. 즉 어느 학교를 나와 어느 직장에 있느냐가 인생의 밑그림을 결정하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찰스 핸디가 예견하는 미래는 어떤 시대인가. 다름 아닌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로 승부하는 프리랜서의 시대다. 20세기 고용문화의 큰 기둥이었던 대기업은 이제 직장인들의 희망이 되지 못한다. 이제 직장인들은 코끼리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벼룩처럼 제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찰스 핸디는 자유를 얻기 위해 안정을 버리고 모험의 세계로 자신을 데리고 온 사람이다. 목사의 아들로 자라 다국적 석유회사인 셸에서 근무하다 그만두고 런던경영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리고 49세 때부터 책 쓰고 강연하고 방송하는 프리랜서가 된 사람이다. 자기표현에 따르면 대기업을 상징하는 코끼리의 한 조직원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자유로운 벼룩이 되어 사는 사람이다. 벼룩은 ‘본인이 창업한 회사의 대표자가 아니라 자신을 대표하는 독립된 인격’을 말한다.

찰스 핸디가 2001년 집필한 ‘코끼리와 벼룩’이 최근 새로 출간됐다.

벼룩인 그는 자신의 인생을 포트폴리오 인생이라 부른다. 그의 하루는 돈을 받고 하는 일, 자원 봉사, 공부, 부부가 함께하는 요리, 청소, 세탁 같은 가사 등으로 채워진다. 1996년에 이미 영국 회사의 3분의 2가 1인 기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미 분명한 현실이 된 ‘벼룩 시대’의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이다. 그는 과거의 세상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대기업이 제공하는 의심스러운 안전보다는 무소속의 자유를 준비하라고 주장한다.

“직장인이 코끼리의 보호를 벗어난다는 것은 외롭고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에 빨리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피터 드러커가 ‘천재적인 통찰력'이라고 극찬한 경영 사상가 찰스 핸디를 전화로 인터뷰 했다.

-어떻게 세계적인 대기업인 셸, 명문 런던정경대학의 종신 교수 자리를 버릴 수 있었나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셸에 입사했을 때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유서 깊은 회사에 입사했다는 사실보다는 ‘직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더 기뻤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편지를 썼죠. ‘나의 생활은 해결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셸이 나의 연수와 발전을 책임지고, 나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또 잘 배울 수 있는 보직을 부여하고, 나와 가정의 재정적 필요를 지원하고, 나의 이력을 전반적으로 기획해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물론 회사가 선전하는 내용을 모두 그대로 믿어선 안 되지만, 회사는 그렇게 해주겠다는 의도를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셸에서 만났던 직원들은 평생 그 회사에서 근무해왔고 다른 데 가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셸의 고위직도 아닌 중간 간부를 몇명 만났단 것만으로 그 회사에 내 평생을 맡길 생각을 한 것이 참 아찔하네요. 당시 셸이 제시했던 직원 경력 관리는 이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직원들조차 그런 요구를 하지 않고 있죠.

또 요즘은 대기업에서 오래 근무해도 부모 세대에게 주어졌던 은퇴 계획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과거 셸의 경우 정년퇴직 후 18개월간 연금을 받게 된다고 안내했는데, 저희 아버지는 은퇴 후 딱 20개월을 더 사셨습니다. 그때에 맞춰진 제도란 것이죠. 하지만 은퇴 후 길게는 5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좋든 싫은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벼룩이 되고 맙니다.”

-직장을 관두면 월급을 못 받는 것도 있지만, 명함, 직함도 사라질 텐데요.

“대기업 생활이 주는 이점 중 하나죠. 대기업 직원이라는 명함 하나로 그 사람의 수입, 지위, 신분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저는 영국 윈저성 내에 세워진 세인트 조지 하우스 소장으로 5년 간 근무했습니다. 세인트 조지 하우스는 사회의 윤리적 문제를 토론하고 영국 교회 내 고위직을 맡을 성직자들을 교육하는 학술연구센터였죠. 우리 부부는 멋진 사교 행사에 자주 초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윈저성을 나온 이후 그런 초대장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죠. 많은 사람이 보기에 우리 부부는 존재조차 없었습니다. “포트폴리오 인생에서 자네 직함은 어떻게 되는 건가? 전(前) 소장이라고 둘러대는 것도 잠시뿐일 텐데”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냥 찰스 핸디인거지!” 아내도 옆에서 “얼마나 멋져요.”라고 거들었지만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했고 설득력도 없었습니다.

사실 저 역시도 대회나 행사에 참석해 내 이름 밑에 아무런 기관명이 붙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발가벗은 느낌이었죠. 이렇게 우리는 코끼리의 보호 없이 사는데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벼룩은 소속 기관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벼룩은 무리 짓지 않습니다. 더 큰 동물을 빨아 먹고 살지만 그 동물의 내부에서 살지도 않고 살 수도 없습니다.

독립한 첫해 크리스마스 파티는 아내와 단둘을 위한 만찬이었습니다. 연말 송년회 파티가 열리는 시점에 이런저런 부서의 초청장이 거의 날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자유로웠지만 외로웠죠.

당시 저는 ‘얼마나 잘된 일이냐’고 중얼거렸습니다. 싸구려 샴페인이 든 종이컵을 들고서 일부러 즐거운 척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1년 내내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동료 앞에서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서 있을 필요도 없었죠.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런 초청장이 그리웠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배제에 의한 죽음이었죠.

나는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만약 내가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면 나는 과연 남들에게 가치 있는 사람일까? 사내 파티가 실존적 고뇌를 가져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해도 공동체의 현대적 상징 중 하나임은 분명했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이제 나에게는 없었죠.”

찰스 핸디는 점점 더 많은 직장인이 반강제적으로 소속 조직이 없는 독립 노동자로 내몰리거나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해 ‘1인 기업’ 역할을 하면서 일과 생활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진=엘리자베스 핸디

-벼룩의 길을 선택할 때 예상했던 바 아닌가요?

“나는 회사에 다닐 때 갇힌 느낌이 들었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수도사가 될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태생적으로 무리를 이뤄 사냥하고 부족 가운데에서 살게 되어 있는 겁니다. 회사의 울타리를 떠났으므로 나는 다른 소속처, 다른 사냥 동료를 찾아야 했습니다. 나 나름대로 어디엔가 속하는 방식을 찾아야 했죠.

만약 내가 소속되고 싶어하는 회사가 있다면 내 회사를 내 힘으로 만들면 되겠지만, 굳이 내 일을 하기 위해 회사까지 차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대신 아내와 함께 개인적은 네트워크 혹은 준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 공동체의 어떤 부분은 우리의 일에서 오고 또 어떤 부분은 우리의 개인적 생활로부터 옵니다.

우리와 가까운 이들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사람들이고 또 우리가 깊은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네트워크는 가만히 내버려둬도 저절로 돌아가는 시스템은 아닙니다. 계속 손을 봐야 합니다.

나는 혼자 있으면 전화를 걸기보다는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전화를 걸어 사람을 초청하는 일은 사회적 에너지나 자신감을 필요로하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받은 상대가 그런 초청을 거절할까 봐 두렵고, 상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봐 무섭습니다.

다행히도 나의 아내는 사회적 브로커와 파트너 노릇을 잘해줍니다. 타고난 벼룩(프리랜서 사진작가)인 그녀는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사업과 개인 생활의 공동체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해온 사람입니다. 그녀는 폭넓고 다양한 친구들과 끊임없이 접촉해왔죠. 그런 접촉에서는 이메일이 물론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만나서 무릎을 맞대고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성공적인 벼룩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을 되살려주는 새로운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는 꿈입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난 뒤 공동체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그다음의 긴장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미래를 창조하고 나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나는 나의 인생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나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려면 직감에 따른 반응 이상의 것, 즉 전략이 있어야 했죠. 그리고 어떤 전략이 효과적으로 발휘하려면 그것은 사명감이나 목적의식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창조하고 싶은 것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자가 되고 싶다,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등의 막연한 꿈이라면 그것은 꿈이기보다는 희망에 가깝습니다. 열정은 막연한 희망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역할을 맡아서 연단 위로 올라가지 않는 한 평소에는 냉정하고 침착하며 수줍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나에게도 꿈이 하나 있었고 그것은 조용한 열정으로 성숙해갔습니다. 비록 여러 해 동안 꿈을 감추고 기업의 중역이 되기로 애써왔지만, 내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내가 타고난 교사라는 것도 알게 됐고, 나의 첫 번째 책이 교재가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운 좋은 사람은 자신의 꿈을 일찍 발견합니다. 나는 열다섯 살에 이미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학교 다닐 때 사업가가 되겠다는 사람처럼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2001년 혼자 돛단배를 이끌고 세계를 일주해 기록을 세운 엘런 맥아더는 아주 어린 소녀 때부터 그런 꿈을 키워왔다고 합니다.

나의 딸 케이트는 건축가가 되려고 열심히 공부하다가 학업 도중에 병이 나 건축학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동업자와 사이가 틀어져서 그것도 그만두고 로마로 건너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체류할 무렵 치료사가 되어야겠다는 그녀의 숨어 있는 꿈이 표면으로 부상했죠.

그녀는 4년에 걸쳐 접골사 과정을 이수했고 지금은 큰 만족과 보람 속에서 접골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발병을 고맙게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것 덕분에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중지하고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요즘 그녀는 환자들과 재미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자신의 열정과 만납니다.

나는 학창시절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 교사가 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셸이 나를 우연히 교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학생이 아닌 성인을 상대로요. 아직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실험해보라. 마음에 드는 것은 뭐든지 해보라.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열정으로 성숙할 때까지 그것을 당신 인생의 중심으로 여기지 마라. 그렇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할 테니”

핸디의 통찰은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스마트워크(Smart Work)와 일맥상통한다. 언제 어디서고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업무 특성에 따라 유연하게 근무할 수 있는 스마트워크 시대에 회사는 더 이상 종신고용이라는 안정감을 주는 평생직장이 되기 힘들다. /사진=엘리자베스 핸디

-그렇다면 삼성과 현대 등 한국의 코끼리는 앞으로 벼룩이 늘어나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옛 스타일의 코끼리는 앞으로 사라지겠지만, 대기업은 여전히 필요하고 또 그 활동 범위는 더 커질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준비하지 못한 코끼리들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죠.

대기업은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회사의 주주는 물론이고 아이디어의 소유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예컨대, 직원이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사내에서 만들어야 합니다. 작은 코끼리로 성장할 수 있는 그런 작은 프로젝트를 회사에서 직접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직원이 벼룩이 되지 않고, 코끼리 내부에서 그 일을 지속할만큼 충분한 혜택을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창의력 있는 젊은 인재는 반드시 회사를 뛰쳐나가 스스로 사업을 시작할 것이고, 삼성 같은 대기업 내부에는 도전 정신이 없는 직원만 남게 될 것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구직난이 심각해지면서, 태어난 환경으로 계급이 정해진다는 수저론 등 자조적인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이들에게 조언해준다면요?

“저는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한 직후 ‘10년 간 취직을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스스로 고객을 찾아서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그들에게 자신감과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개인적인 기술을 키워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서 취직을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자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취직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한국의 청년들에게도 ‘구직’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물론 이런 사고의 변화를 위해선 우리의 교육제도부터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 기술을 키워주고 스스로 하나의 회사를 꾸려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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