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기일을 그냥 지나쳤다.
제헌절인 7월 17일이기 때문에 여간해선 잊지 않았는데 금년엔 그만 잊고 말았다.
오빠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
그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라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그와 흡사하게 나는 오빠 생각을 하며 지냈다.
그것은 육친을 잃은 슬픔이라든가 아픔이라든가 혹은 그리움 같은,
별리가 주는 일반적인 감정하고는 거리가 먼, 뭐랄까 일종의 습성이라 해도 좋다.
남들과는 살가우면서 가족들에게는 거리를 두었던 일.
객지로 돌던 학교와 직장생활.
회생할 수 없는 중증의 결핵환자가 되어 들것에 실려 왔던 귀가.
가히 순교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병상의 날들.
이런 모든 것도 생각하지만 늘 내게서 떠나지 않는 것은, 오빠가 떠나고 난 자리이다.
너무도 간단한 뒷자리이다.
투병생활의 마지막 18년은 두 평 반짜리 방에서 한 발자국도 떼어보지 못하고, 누워서만 지냈었다.
오빠를 산에 묻고 돌아 온 날, 깔고 있던 요와 이불, 머리맡의 성모상과 휴지통,
몇 권의 책들을 치우니 오빠가 이 세상에 있었던 흔적이 5분만에 사라졌다.
결혼을 안 했으니 일점 혈육도 없고, 스무 해를 출입을 못했으니 옷도 양말도 신발도 있을 리 없었다.
53년의 세월이 단 5분으로 정리되는 간단 명료 앞에서 안타까움이나 허무 대신
어떤 강렬한 감동에 압도당했던 순간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보다 어렵고 힘들 때에 오빠를 생각한다.
부질없는 욕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나 단념할 것을 단념하지 못해 괴로울 때 오빠를 떠올린다.
올해는 새해 벽두부터 고통의 연속이었다.
지난해의 판단착오의 결과가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럴 때마다 오빠 생각을 더 많이 했고, 기일이 되면 미사도 바치고 산소도 둘러보리라 했는데
성묘는커녕 날짜마저 잊고 지냈다.
나의 의지나 결심이란 얼마나 제멋대로인가.
번번이 행하고자 하는 것을 행치 못한다.
스스로를 질타하면서 늦게나마 기도 준비의 촛불을 켠다.
어른거리는 촛불 사이로 오빠의 모습이 보인다.
오빠가 병을 얻은 것은 오빠 나이 스물네 살 때 A시에 있는 가축위생병연구소 시절이었다.
해방을 맞았을 때가 중학교 졸업반.
우리 5남매 가운데선 물론이고 문중의 종형제를 통틀어 제일 영민했던 오빠는
부모님의 기대를 마다하고 농대를 지망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시급한 과제는 농촌의 근대화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문제로 부모님과 소원한 사이가 되었고, 수원에 있는 학교까지
당시로는 통학이 여의치 않아서 자취 혹은 하숙을 하며 대학을 마쳤다.
졸업 후에 들어간 직장 또한 지방에 있는 연구소였다.
오빠와 나는 열 살 터울이라 같이 뒹굴며 보냈을 추억이 있으련만
내 유년의 기억 어느 부분에도 오빠와 함께 떠오르는 장면이 없는 것은
아마 오빠의 이런 객지생활 탓인 듯하다.
오빠는 연구실에서 기거를 하며 돈(豚)콜레라 왁친 연구에 몰입했다.
가축은 농민의 큰 재산인데 전염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떼죽음을 당했다.
그 예방약을 만드는 일이다. 맨 먼저 한 것은 시계를 없앤 일이었다고 한다.
밤낮이 없는 연구 실험 또 연구, 그나마 받는 적은 월급은 최소한의 식비를 제하고는
인근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썼다. 과로에 영양실조, 결핵은 필연이었다.
오빠는 자기의 발병을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남몰래 약을 복용했다.
왁친 연구를 멈출 수가 없었고, 실망만 안겨드리고 도망치듯 떠나온 부모님께
차마 알릴 수가 없었다. 젊었다는 것 하나로 혼자 이겨보려고 했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라면, 두 번째 불행은 그 이듬해 일어난 6․25동란이다.
가족과 떨어져 직장을 따라 남하했는데 전쟁의 와중에서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불규칙하게 복용했던 약은 내성만 키워 오히려 악화를 초래했다.
이 때쯤은 부모님도 오빠의 병을 알았다.
입원 치료를 했지만 치유는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몰래 병원을 빠져 나온 오빠는 곧장 연구소로 달려가 연구를 계속했다.
왁친은 성공했고, 오빠는 들것에 실려 우리 곁으로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때가 오빠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수술 시도도 해 보았다.
그러나 10년 동안에 오빠의 양쪽 폐는 좀이 먹듯 촘촘하게 상해 있어서 절단해 낼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신체 다른 부위에까지 옮겨져서 1년을 장담할 수 없다는 마지막 선고를 받았다.
퇴원한 이래 두 평반짜리 방의 문지방을 한 걸음도 넘어보지 못하고
오빠는 일년의 열여덟 배를, 현대 의술로서 알 수 없다는 18년의 생을 살아낸 것이다.
우리는 오빠를 얼마나 몰랐던가.
오빠가 집으로 온 후 A시에서 연일 병문안을 왔는데,
공부를 시켜준 사람, 병을 치료해 준 사람, 빚을 갚아준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오빠를 따라온 물건은 찢어진 구두와 낡은 옷 한 벌, 그리고 성모상이 전부였다.
오빠는 피난지에서 영세를 받고 카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빠를 살아 있는 예수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감격하지 않았다. 그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내 몸이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는―.
나는 그후 곧 출가를 했기 때문에 오빠의 병상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그런 만큼 마음은 더 무거웠고, 7순의 노모가 회생의 기약도 없는
아들의 병수발을 드는 것을 볼 때는 앓는 오빠도 오빠지만
늙은 어머니가 딱하고 가엾어서 부엌 서쪽 창문을 열고
그 너머에 있는 친정 쪽 하늘을 보며 눈물을 짓곤 했다.
어머니는 밥을 떠 먹이는 것은 물론 대소변도 받아내셨다.
“어머니는 힘드시지 않우?”
내가 물으면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다.
“아니 힘들다가도 감복을 하니까 힘들지 않어.
네 오래빈 사람이 아니다. 성인도 그럴 수 없어.”
오랜 병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고독이라고 한다.
더구나 결핵 말기의 전염병 환자임에랴.
오빠를 은인이라고 칭송했던 사람들의 발길도 끊기고, 가족들과도 격리되어 있었다.
나와 동생의 아이들을 무척 보고 싶어했지만 선뜻 데려가지 못했다.
오빠가 수용했던 것은 육신의 고통과 더불어 정신의 고독이었다.
긴 병 환자에게서 있음직한 짜증이나 비관이 전혀 없고 어떤 것도 감사하며
늘 편안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누워만 있기 때문에 욕창이 심했는데, 핀셋으로 살속의 벌레를 골라낼 때까지도.
내가 보기에도 오빠는 살려고 집착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누워 있을 망정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어머니의 병구완은 자연히 그 규칙에 맞춰 시행되었다.
오빠는 다섯 가지 약을 열심히 먹었다.
그 약들이 자기를 살리지 못할 것을 잘 알면서도 지성으로 먹었다.
그것은 만에 하나 소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자기 목숨에 대한 최대의 성실이었다.
성한 몸이든 병든 몸이든 생명을 부여받은 자로서 생명을 준 자에 대한 최대의 경의였다.
한 달에 한번 봉성체해 주시는 신부님도 놀라운 신자라고 칭찬을 하셨고,
기도하러 온 레지오 단원들은 자기들이 은혜를 받고 간다는 말을 했지만,
7순의 노모 생각으로 나는 그들과 같은 마음이 되지 못했다.
"그게 뭐야. 그건 사는 게 아냐." 딱하고 가슴 아플 뿐이었다. 안타까움에 분노마져 일어났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 오빠의 몫까지를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생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저금액수를 늘려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오빠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늙은 부모님의 처진 어깨를 내 활기로 일으켜 세우려는 듯이.
사랑할 것이 많은 생활, 사랑할 것을 많이 늘려 가는 생활은 생에 대한 의욕을 높여주기도 했다.
오빠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굳어가기 시작한 것은 오빠가 집에 온 지 18년 2개월 째였다.
목까지 올라오는데 닷새가 걸렸다.
그간에도 오빠는 의식이 분명해서 자기 생명의 소멸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나를 보고 오빠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다.” 그리고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모처럼 달디단 잠에라도 빠져 보려는 듯 편안하게, 그 모습은 아주 맑고 고왔다.
입술엔 홍조마저 살아났다.
“영진이 이뻐진 얼굴 좀 와서 보아라.”
용케 감정을 다스리시던 아버지가 고함을 치며 오열을 터뜨리셨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갔지만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작부터 나는 어떤 화살에 명중이나 된 듯 꼼짝을 못하던 상태였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숨진 오빠의 얼굴을 보는 찰나,
그 얼굴 위로 고뇌에 일그러진 나의 죽어 가는 얼굴을 보고만 것이다.
무슨 조화였을까. 두고 가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사랑하는 아이들,
열심히 불려놓은 저금통장, 아름다운 집.
이 모든 좋은 것들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어 부릅뜬 눈의 내 얼굴을 보고 만 것은....
"오빠야, 오빠야, 내가 졌어."
남들이 들으면 이해 못할 소리를 해대며 나는 엉엉 울었다.
옆에서 보기에 답답하고 지루하고 한심한 병상에서 오빠가 누렸을 자유,
그 자유가 내게 전이되어 오는 순간이었고,
그것은 내 기억 속의 오빠를 더 이상 불행한 사람이었다고 단정 짓지 않아도 좋은,
육친으로서의 위안이 되어 있는 눈물이었다.
50여 년의 세월이 5분으로 마감되는 완전하고 깨끗한 종결에 전율했던 것도
이런 맥으로 이어진 충격과 감동이었다.
오빠가 떠나고 난 후 가족과 친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 둘 오빠의 신(神)을 찾아갔다.
일찌기 두 딸을 잃은 아픔을 부처의 가르침으로 달래던 어머니와
유학(儒學)을 생의 근본으로 삼던 아버지, 무신론자인 누이들과 친척들까지 모두.
살아 생전 제 손으로 밥 수저 한번 제대로 잡지 못한 무능한 한 병객이,
어떤 건강한 사람도 하지 못한 얼마나 엄청난 일을 우리에게 해주고 갔는가를 생각하며,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는 오빠를 떠올린다.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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