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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세상을 바꾼 27개 단어.....퍼온글

미국 뉴욕 주의 롱아일랜드 해안의 존스비치 공원. 공원으로 진입하는 도로를 가로지르는 약 3m 높이의 다리가 놓여 있다. 약 3.5m의 버스가 지나지 못할 만큼 낮은 높이다. 당연히 버스를 타고 공원을 지날 수는 없다. 도대체 다리를 왜 이렇게 낮게 놓았을까?

이유는 '흑인이나 가난한 사람이 절대 공원에 다가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단다. 이들이야 말로 버스의 주된 승객이지 않던가. 설계자의 심술을 깨닫지 못한다면 가난한 자들은 자연스레 소외당할 수밖에 없겠다. 왜 자기들이 '대중을 위한 공원'에 좀처럼 발걸음 안 하는지를 알 턱이 없으니, 분한 마음조차 들지 않을 테다.

장면을 바꿔 보자. 1960년대 미국 하버드 대학 졸업식, 어느 법대생이 나와서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우리의 거리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대학들은 폭동과 소요를 일삼는 학생들로 가득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파괴하려 합니다. 러시아는 힘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안으로부터의 위험, 외부로부터의 위험. 우리에게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 없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뜨거운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박수가 잦아들자 법대생은 청중에게 조용히 말한다.

"여러분! 지금 말한 내용은 1932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행한 연설이었습니다."

일상은 늘 이런 식이다. 국회의사당 앞에는 넓디넓은 도로가 가로 막고 있다. 작정하지 않고서는 국회에 다가가기조차 꺼려질 정도다. 경사로 없는 계단은 또 어떤가. 높은 계단은 그 자체로 누구에게는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가 된다. 장애인이라면, 노약자라면 계단 위의 공간에 다가갈 엄두를 못 낼 테다. 이처럼, 표 안 나게 차별을 담은 장치들은 생활 곳곳에 널려 있다.

뉴스를 채우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정치가의 입에서는 독재 시절에나 할 법한 이야기들이 튀어나오곤 한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따분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받아 넘길 뿐이다. 독재자들의 논리와 똑같다는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하는 탓이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소크라테스의 직업(?)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것이었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됐지, 무슨 생각이 필요해? 좋은 게 좋은 거지. 머리 아프게 그딴 고민은 뭘…"

대부분의 '생활인'들은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산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모기처럼 끈질기게 시민들에게 달라붙었다. 자신을 '살찐 말을 깨우는 등에(gadfly)'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시민이 깨어있는 사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토론으로 늘 시끄러워도 사회는 언제나 나아지고 있다. 건전한 민주주의를 최고의 정치제도로 여기는 이유다.

 

최근에 나온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동녘) 시리즈는 '우리 시대의 소크라테스' 같은 책이다. 지은이는 한국철학사상연구소의 젊은 철학자들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아홉 가지 단어>, <세계를 바꾼 아홉 가지 단어>, <현실을 지배하는 아홉 가지 단어>. 시리즈를 이루는 책의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인간'과 '세계', 그리고 '현실'은 철학의 고갱이를 이루는 고민거리 아니던가.

게다가 책들은 각각 인간, 세계, 현실을 꿰뚫는 열쇳말을 9개씩 추려 낸다. 권력, 진보, 소비, 환경, 소수자, 이기주의, 빈곤, 소유, 분배 등등, 27개의 핵심 열쇳말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등에(gadfly)'에 제대로 물리게 될 테다. 불편한 마음으로 일상을 다시 보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재테크는 우리 시대의 생존 수단이다. 열심히 일한다고 부자 되기는 어려운 세상이다. '워킹 푸어(working poor)'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한 재산 모아서 편안하게 살려면 금융 지식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의 경제 감각을 키운다는 이유로 '모의 증권 투자 대회'까지 열리는 시대다.

하지만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은 금융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일깨워 준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외쳤다. '생산 활동으로 이윤을 좇지 않고 고리대금업 같은 금융 자본 운영을 이윤 추구의 기본 형태로 삼는 태도'는 천민자본주의일 뿐이라고.

막스 베버의 잣대로 보자면, 재테크도 일종의 천민자본주의 아닐까? 불편한 의심을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며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 문제 있는 것을 좋다고 여기면 꼭 탈이 나기 마련이다. 온 세상은 지금도 금융 위기에 휩싸여 있다. 거덜 난 나라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베버는 금융 이득을 높이 사는 경제 구조를 왜 '천민자본주의'라고 불렀을까? 지금 우리의 삶을 보면 답은 분명해 보인다.

나아가 책은 친절하게도 천민자본주의에서 빠져나올 방법까지 고민하게 만든다. 일단 막스 베버의 주장부터 알아보자. 베버는 자본주의가 자라났던 이유로 '기독교 윤리'를 꼽는다. 근검과 절약은 기독교의 미덕이다. 게다가 신이 나에게 내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소명(召命) 의식 또한 강렬하다. 그러니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겠다. 넉넉하게 거둔 재물은 고스란히 저축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자본이 되어 경제가 자라났다. 이 같은 자본주의의 기본 정신에만 충실했어도 서구 사회는 지금 같은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경제 문제도 결국 '철학의 부재' 탓이 아닐까? 어떤 삶이 제대로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눈앞의 결과에만 매달리기 십상이다. 치열한 경쟁은 정말 중요한 물음에 눈감게 만든다. 그럴수록 우리는 행복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 버린다.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 3권을 읽다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점점 커진다.

책 곳곳에 심어놓은 인용들도 적절하다.

"현대 문명의 바탕은 소유욕이다. 소유욕은 공동체 사회에서는 발붙일 길이 없었다. 함께 일해서 함께 나누고, 있으면 같이 먹고 없으면 같이 굶는 사회에서는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데 내 것 네 것을 가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공동체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저마다 제 살길을 찾아야 하는 사회 체제가 들어서면서 내 것과 네 것은 갈라지고, 서로 더 많이 갖고, 많이 쌓아두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공동체의 마지막 울타리까지 무너져 모든 사람이 사회적 원자로 뿔뿔이 흩어진 사회다. 너를 물어뜯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다. '사람이 사람에게 늑대인(homo homini lupus est) 사회', 바로 이것이 현대 문명을 이루고 있는 인간들의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적나라한 구도다."

 

막스 베버의 설명에 이어지는 인용구이다. 꼬리 설명을 보니 철학자 윤구병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에서 따온 글이란다. 치밀한 논리로 깨진 편견의 자리를, 뭉클한 감동으로 채워주는 구도다. 이처럼 시리즈를 이루는 27개의 열쇳말은 하나하나 튼실하게 꾸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이 시리즈에는 장점만 있지는 않다. 저자는 무려 27명에 이른다. 당연히 글의 수준은 들쑥날쑥하다. 때에 따라서는 수긍이 안 갈 만큼 엉성한 논리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또한 이 시리즈의 '미덕'일 수도 있다. 생각하는 능력은 비판과 함께 자라난다. 완성도 떨어지는 글을 만났다면, 책 여백에 멋진 반박 논리를 적어보는 것도 좋겠다.

게다가 책에는 보수주의의 원조 격인 에드먼드 버크에서 '이념의 황소머리'인 카를 마르크스, 장 보드리야르에서 중국의 현대 철학자 리저허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론이 소개되어 있다. 책장 곳곳에 자기 생각을 키워줄 지적 영양제가 가득 담겨 있는 셈이다.

나아가, 시리즈의 27개의 열쇳말은 하루에 하나씩 '맨털 짐네스틱(mental gymnastic)'을 위한 화두로 삼기에도 제격이다. 시리즈를 완독한다면 어느덧 독자는 '몸짱 영혼'을 갖추게 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이해하는 아홉 가지 단어>, <세계를 바꾼 아홉 가지 단어>, <현실을 지배하는 아홉 가지 단어>, 시리즈를 이루는 세 권의 책 제목이다. 인간, 세계, 현실은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세 기둥이다. 이번에는 제목의 가운데 낱말만 모아보자. '이해하고 바꾸고 지배하라.' 이 또한 철학함을 이루는 세 가지 주된 활동 아니던가.

'세상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며, 시대의 가치관을 만들어 뿌리 내리게 하는 책',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은 생각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이 새겨 읽어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