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한 낮, 어부는 게으르게 잠만 잤다. 일 해야 하는 시간에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보다 못한 관광객이 말을 건넨다. "할아버지, 고기잡이 안 나가세요? 해가 높이 떴는데." 어부는 말한다. "벌써 새벽에 한 번 다녀왔네.", "그럼 또 한 번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 뭐하게?", "그럼 낡은 배를 새 것으로 바꿀 수 있잖아요?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고요.", "그러면?", "더 큰 배를 사서 사람도 부리지요. 돈도 더 많은 벌 테고.", "옳지. 그러고 나면 뭘 하지?", "할아버지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누워서 지내실 수 있어요." 마침내 어부는 답한다.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잘 지내고 있다네."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너머학교 펴냄)에 실린 이야기다. 세상에는 온갖 재(財)테크들이 넘쳐난다. 출세하고 인정받는 방법을 일러주는 처세의 가르침도 널려있다. 그러나 과연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행복해질까?
이 물음에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잘 사는 나라에는 우울증 환자도 많지 않던가. 잘 나가는 기업의 CEO나 인기 절정의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돈과 출세를 죽어라고 좇을까?
어린 아이는 잃어버린 사탕 하나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어른은 다르다. 인생 전체로 보면 사탕은 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욱 성숙한 인격을 가진 이들은 재산과 명예마저도 하찮게 여기지 않을까?
행복의 문은 '왜 그렇지?'라고 물을 때 열린다. 잘 사는 삶은 등 따시고 배부른 데 있지 않다. 잘 사는 삶이란 '생각하는 삶'이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려면 무엇이 진정 나를 행복하게 할지부터 고민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중요한 물음을 건너 뛰어 버린다. 그러곤 '어떻게?'만 묻는다. 큰돈이 왜 필요한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달리는 식이다. 이들이 행복해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만큼이나 어렵겠다.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왜?'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생각 없는 삶은 나 자신을 악마로 만들기도 한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유태인 수용소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이다. 숱한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힌 그는 원래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성실한 '공무원'이었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자기가 하는 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지지 않고, 그냥 명령에 성실하게 따르기만 했다. 그래서 결국 악마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과연 아이히만보다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값싼 음식과 상품을 즐기며, 그 속에 숨은 못사는 나라 노동자들의 눈물과 한숨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격을 후려치고 더 좋은 서비스를 바랄수록, 세상 누군가는 그만큼의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 기업들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사정없이 직원들을 떨어낸다. 그렇게 되는 데는 생각 없이 싸고 편리한 것만 좇는 나의 생활 태도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을 읽다보면 점점 고민이 늘어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는 스스로를 등애(Godfly)라고 불렀다. 등애는 끊임없이 잠에 빠져들려는 말을 귀찮게 하여 깨어있게 만든다. 소크라테스도 쉴 새 없는 물음으로 생각을 놓으려는 사람들을 성가시게 했다. 과연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기 위해서다.
진정한 친구는 소크라테스와 같아야 한다. 게임에 빠져든 친구를 "무엇을 하건, 그건 너의 권리야"라며 내버려 두는 것이 진짜 우정일까? 오히려 진정한 우정은 간섭하는 데 있다. 친구가 게임을 못하면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에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게임의 노예가 된 상태다. 그를 자유롭게 하고 싶다면 간섭하고 충고해 주어야 한다.
오항녕의 <기록한다는 것>(너머학교 펴냄)도 생각의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 <맹자>에는 역사책 <춘추>가 나왔을 때의 사회 모습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세상살이의 질서와 원칙이 느슨해지면서, 거짓된 말과 몹쓸 행동이 생겨났다. 신하가 임금을,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공자가 걱정되어 <춘추>를 지었는데, (…) <춘추>가 완성되자 난신(亂臣) 적자(賊子)들이 벌벌 떨었다.
왜 교활한 신하와 도적들이 벌벌 떨었을까? 기록은 사람을 두렵게 한다. 서양에서는 죽은 뒤에 내 삶을 평가 받는다고 믿었다. 잘못을 많이 하면 신이 나를 지옥으로 보내는 식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죽은 뒤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역사가 곧 우리 삶의 '심판관'이었다. 후세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항녕은 '과거를 잊은 사람은 평생 그것을 지속할 운명'이라고 말한다. 자기의 삶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막 살지 못할 테다. 또한, 예전의 실수와 잘못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좀 더 나은 삶을 좇기 마련이다. 역사 공부는 그래서 중요하다. 기록의 무서움을 깨닫게 될뿐더러, 지금의 나의 모습을 과거에 견주어 반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공부가 되레 해로울 때도 있다. 오항녕이 들려주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자를 발명한) 토트신이여. (…) 글자는 그것을 배운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에 무관심하게 해서 그들의 영혼 속에 망각을 낳을 것이오. 그들은 적어 두면 된다는 믿음 때문에 바깥에서 오는 낯선 흔적들에 의존할 뿐, 안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힘을 빌려 상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러니 그대가 발명한 것은 기억의 묘약이 아닙니다.
생각 없이 기록하고, 적힌 사실을 고민 없이 달달 외우기만 하는 우리네 역사 교육을 꼬집는 말처럼 들린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듯 생각 없이 역사를 다루지 않았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은 엄청난 분량의 역사 기록이다. 200자 원고지에 옮겨 적어 쌓으면, 그 높이가 무려 63빌딩의 세 배에 이른단다.
<조선왕조실록>의 놀라운 점은 기록의 양에만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역사에 대한 반성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예컨대, <선조실록>은 문제가 많은 기록이었다. 몇몇 사람들의 의견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이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원래 있었던 <선조실록>은 없애버렸을까? 그렇지 않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모두 남겼다. 후세 사람들이 이 둘을 견주어 보며 무엇이 진실인지 생각해보게 하기 위해서다.
역사의 가치는 생각을 위한 밑바탕이 된다는 데에 있다. 줄기차게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를 곰곰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훌륭한 왕과 정치가들이 역사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이유다.
남창훈의 <탐구한다는 것>(너머학교 펴냄)은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의 가치를 일깨운다. 그는 생화학과 면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이다. 그는 뉴턴에 얽힌 흥미로운 사실을 들려준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떠올렸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하지만 위대한 발견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법이다. 뉴턴은 실수로 끓는 물에 달걀 대신 회중시계를 집어넣기도 했단다. 연구에 너무 골똘해 있던 탓이다. 탐구를 위한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열정이 있어야 한다.
무엇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은 그것에 대한 애정이 있을 때 생긴다. 세계적인 침팬지 연구자 제인 구달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주빌리'라는 침팬지 인형을 선물 받았다. 그녀의 애정은 살아있는 침팬지 연구에까지 이어졌다. 80 평생, 그녀는 침팬지에 애정을 쏟았다. 이런 열정이 있는 사람이 업적을 남기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무엇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있는가? 간절한 마음은 생각을 빚어낸다. 생각은 다시 사랑하는 대상을 절절하게 알고 싶은 열정을 낳는다. 삶이 헛헛하게 느껴진다면, 나의 삶의 가치를 찾게 해줄 것은 무엇인지부터 깊이 고민해볼 일이다.
<생각한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 <탐구한다는 것>은 너머학교에서 내놓은 '열린 교실' 시리즈이다. 열린 교실은 닫힌 교실로 이루어진 우리 교육에 훌륭한 대안이 된다. 닫힌 교실에서는 '왜?'를 묻지 않는다. '어떻게?'만 가르칠 뿐이다.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따지지 않고 어떻게 해야 좋은 점수 받아 대학을 가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지만을 고민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너머학교에서 내놓은 <생각하는 것>, <기록한다는 것>, <탐구한다는 것>은 공교육의 보완재가 될 만한 책이다. '어떻게?'는 '왜?' 다음에 던져야 할 물음이다. 그럼에도 공교육은 '왜?'라는 물음을 잃어버렸다. 너머학교의 시리즈들은 공교육이 놓아버린 '왜?'를 찾아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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